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요미우리 자이언츠/선수목록 (문단 편집) === 투수 === * [[사와무라 에이지]] (1934 - 1937, 1940 - 1941, 1943) 전쟁으로 인해 일찍 산화한, 초기 일본 야구의 신화적인 선수. * [[빅토르 스타르핀]] (1934 - 1944) 러시아계 일본인으로 초기 거인군의 에이스였다. * [[나카가미 히데오]] (中上 英雄, 1942 - 1944, 1946, 1948 - 1955) '''한국계 일본인'''으로 1918년 5월 18일, [[부산광역시]]에서 태어났다. 1944년, 25살의 나이로 감독직에 올랐는데 이는 일본 프로야구 최연소 감독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다. 일본 프로야구 역사상 최초의 [[퍼펙트 게임(야구)|퍼펙트 게임]]을 달성하기도 했고, 1976년에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선수시절 '''후지모토 히데오(藤本 英雄)'''라는 등록명을 사용한 시기가 있는데 퍼펙트 게임은 이 시기에 달성했다. 그래서 일본 프로야구 사상 최초의 퍼펙트 게임 투수라고 하면 보통 후지모토 히데오라고 한다. * [[벳쇼 다케히코]] (1949 - 1961) 본명은 [[벳쇼 아키라]] 였지만 요미우리에 입단한 이후 개명하였다. [[난카이 호크스]]의 에이스였으나 요미우리로 이적하는 과정에서 분쟁이 발생했고, 이 '''벳쇼 빼내기 사건'''은 일본 프로야구가 양대리그로 분리되는 계기를 제공하면서 일본야구 역사의 중대한 분기점을 남긴 선수. 선수로서도 통산 310승(NPB 역대 5위), 335완투(역대 4위), 4350.2이닝(역대 5위), 평균자책점 2.18의 뛰어난 성적을 남긴 당대의 대투수였다. * [[후지타 모토시]] (1957 - 1964) 역대 요미우리 감독 중에서는 큰 인상은 남기지 못했지만 나가시마와 오 사다하루의 임기 사이에 ~~땜빵~~ 가교 역할을 하면서도 그 사이에 두번의 일본시리즈 우승을 이룬 명장. 나가시마가 1980년 해임당하고 나서 같은 해에 은퇴한 오 사다하루가 코치로서 경력을 쌓는 동안[* 오 사다하루가 나가시마의 뒤를 이을 감독이 되는 것은 [[답정너|거의 정해진 수순]]이었지만 요미우리는 나가시마의 선수 은퇴 직후 V9을 이끈 가와카미 감독이 물러남과 동시에 지도자 경력이 없던 나가시마를 바로 그 자리에 앉혔다가 구단 사상 최초의 최하위(75년)을 기록한 흑역사가 있었다. 그 때문에 선수에서 은퇴한 오 사다하루를 지도자 경력 없이 바로 감독자리에 앉히는 것에 부담을 느끼고 있었다. 이를테면 오 사다하루가 정식 감독으로 취임하기까지 시간 벌기용으로 앉힌 감독인데 그 동안 오 사다하루를 조감독 자리에 앉혀서 감독수업을 받게 했다. 이러한 형태는 나가시마가 두번째 임기 때 [[하라 타츠노리]]에게 정권을 이양하는 과정에서 또 한번 나타났다.] 감독 부임 첫 해인 1981년에 [[1981년 일본시리즈|일본시리즈]][* 이 일본시리즈가 일본 프로야구 역사상 유일한 덕아웃 시리즈이다. 상대는 당시 [[고라쿠엔 구장]]을 홈구장으로 같이 쓰던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닛폰햄 파이터즈]] 이다.] 우승을 차지했다. 그리고 3년 후인 1983년 세이부와의 [[1983년 일본시리즈|일본시리즈]]에서의 패배[* 7차전까지 갔는데 역대 일본시리즈 중에서도 손꼽히는 명승부 중에 하나였다.]의 책임을 지는 형식으로 후지타가 자진사임히고 ~~정해진 수순대로~~ 오 사다하루가 감독으로 앉았는데 오 사다하루가 임기 5년동안 기대이하의 성적을 거두자 88년 시즌 후에 자진 사임의 형식으로 오 사다하루를 물러나게 했다. 다음은 첫번째 임기 당시 일본시리즈 우승이라는 과제를 안고 본의 아니게 물러난 나가시마를 다시 감독으로 앉혀 명예회복의 기회를 주는 수순이었으나 나가시마 본인이 ~~아직은 때가 아니라면서~~ 고사하는 바람에 다시 급하게 후지타에게 감독 취임을 요청했고 감독자리에 재취임한 후지타는 부임 첫해인 89년 다시한번 [[1989년 일본시리즈|일본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 이 일본시리즈가 그 유명한 기레기들의 찌라시 기사 한 방에 긴테쓰의 '''3연승 후 역스윕'''이라는 안습의 신화를 만들어낸 일본시리즈이다.] 4년동안 요미우리를 지휘한 뒤 1992년 야쿠르트와의 치열한 경쟁 끝에 2위로 시즌을 마감하고 우승 실패를 책임지는 형태로 다시 사임을 했고, 후임에는 ~~FA와 역지명제 도입 등으로 돈질로 선수들을 싹쓸이하는 게 가능해진 때를 기다려온~~ 나가시마가 다시 취임했다. * [[미야타 유키노리]] (1962 - 1969) 뛰어난 실력을 지녔지만 심장 질환때문에 선발로 긴 이닝을 던지기 어려워지자 구원 투수로 전업해 활약했다. 동시대의 [[곤도 마사토시]]나 이후의 [[에나츠 유타카]] 등과 함께 일본프로야구 전업 구원투수의 1세대라 할 수 있으며, '8시 30분의 사나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뛰어난 구원 투수로 활약했지만 혹사의 여파로 짧은 전성기 이후 그대로 선수생활이 끝났다. 이후 [[세이부 라이온즈]]와 요미우리 등에서 뛰어난 투수코치로 활약했다. * [[죠노우치 쿠니오]] (1962 - 1971) * [[다카하시 카즈미]] (1965 - 1975) V9 시절 호리우치의 뒤를 이은 2선발, '왼손의 에이스'로 활약한 좌완투수. 1976년부터 1983년까지는 같은 [[고라쿠엔 스타디움]]을 홈으로 쓰는 [[퍼시픽 리그]] 팀 [[닛폰햄 파이터즈]]에서 준수한 선발투수로 선수생활을 이어갔으며 1981년 친정팀 요미우리와의 덕아웃 시리즈로 열린 [[1981년 일본시리즈]]에도 1차전과 5차전에 선발등판해 맞대결을 가지기도 했다. * [[호리우치 츠네오]] (1966 - 1983) 고시엔 2대 괴동. V9 시절을 대표하는 요미우리의 에이스였으나 실력외에도 기행이 하늘을 찌르던 이단아. 감독으로선 팀을 대차게 말아먹었다. * [[장명부]] (1968 - 1972) 김일융과 동일한 경로([[재일 한국인]]의 외국인 간주로 인한 드래프트 번외 지명)으로 입단해 꽤 큰 기대를 받았지만 끝내 요미우리에서는 포텐을 터트리지 못하고 [[난카이 호크스]]로 트레이드된다. * [[김일융]] (1968 - 1983) 일본명 니우라 히사오. 나가시마 감독하에서 70년대 후반 요미우리의 좌완 에이스로 활약하였다. * [[고바야시 시게루]] (1973 - 1978) 요미우리의 에이스였으나 에가와 사건에 얽혀 한신 타이거즈로 트레이드된 비운의 투수. * [[니시모토 다카시]] (1975 -1988, 1994) 70~80년대 초반 거인의 우완 에이스. 우타자 몸쪽으로 날카롭게 꽂히는 슈트가 주 무기였다. 2014년 오프시즌에서 [[김성근]] 감독을 따라 [[한화 이글스]] 투수코치로 부임했다. * [[가토 하지메]] (1976 - 1990) * [[스미 미츠오]] (1978 - 1989) * [[에가와 스구루]] (1979 - 1987) '공백의 1일'로 드래프트를 시끌시끌하게 만들었던 인물. 이후 짧지만 강렬한 전성기를 맞으며 에이스로 군림했다.[* 또 여담이지만 [[근육맨]]의 주인공 [[근육 스구루]]의 이름의 모티브이다.] * [[카토리 요시타카]] (1979 - 1989) 80년대 요미우리의 주축 셋업맨이었던 사이드암 투수. 요미우리 생활 이후 [[세이부 라이온즈]]로 이적한 뒤에도 뛰어난 구원 투수로 활약해 세이부 왕조 시대를 떠받들었다. 은퇴 이후 여러 차례 요미우리의 투수코치를 맡았다. * [[마키하라 히로미]] (1982 - 2001) 2016년 기준 일본 프로야구 최후의 퍼펙트 게임 투수. 사이토, 마키하라, 쿠와타는 거인의 세 기둥으로 불렸다. * [[사이토 마사키]] (1983 - 2001) '[[헤이세이]]의 대 에이스'. 80년대 말-90년대 후반의 사이드암 에이스. * [[코다 이사오]] (1984 - 1994) * [[김기태(재일교포)]] (1985) 히로시마의 언더핸드 에이스로 활약하고 1976년 카프의 첫 리그 우승 장면의 주인공이기도 했지만, 사고로 인한 기량 저하로 인해 [[장명부]]와의 맞트레이드로 [[난카이 호크스]]로 이적해 구원 투수로 뛰면서 어느 정도 재기했다. 하지만 요미우리에서는 그다지 좋은 활약을 하지 못했고 이 해를 마지막으로 일본 무대를 떠나 [[한국프로야구]] [[청보 핀토스]]에서 뛰게 된다. * [[미야모토 카즈토모]] (1985 - 1997) * [[쿠와타 마스미]] (1986 - 2006) [[키요하라 카즈히로]]와 함께 'KK 콤비'를 이 뤄 고교 야구를 제압한 스타. 요미우리에서도 에이스로 활약했다. * [[이시게 히로시]] (1986 - 1996) * [[오카지마 히데키]] (1994 - 2005) 요미우리에서는 선발과 중간계투, 마무리 등 여러 보직을 오가며 미묘한 활약을 했지만 2006년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에서 셋업맨으로 활약한 것을 시작으로 메이저리그에서도 준수한 좌완 중간계투로 활약했다. * [[카와하라 준이치]] (1995 - 2005) * [[조성민]] (1996 - 2002) 대형 유망주로 주목받았으나 부상 이후 재기하지 못했다. * [[발비노 갈베스]] (1996 - 2000) 심판에게 위협구를 던진 카리브의 괴물. 1999년에는 요미우리 구단 사상 처음으로 외국인 투수로서 개막전 선발을 맡을 정도의 실적을 거두었지만 지랄맞은 성격이 발목을 잡았다. * [[우에하라 고지]] (1999 - 2008, 2018 - 2019.5) * [[쿠도 키미야스]] (2000 - 2006) [[세이부 라이온즈]],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의 우승청부사. 요미우리에서도 두 번 일본시리즈 정상에 서고 통산 200승 고지도 밟는다. * [[다카하시 히사노리]] (2000 - 2009) * [[정민철]] (2000 - 2001) * [[정민태]] (2001 - 2002) * [[게리 레스]] (2003) * [[기사누키 히로시]] (2003 - 2009) * [[쿠보 유야]] (2003 - 2015) * [[니시무라 켄타로]] (2004 - 2018) * [[우츠미 테츠야]] (2004 - 2018) 2000년대 후반에서 2010년대 초반까지 요미우리의 토종 에이스로 활약한 좌완 투수. 오릭스의 지명을 거부하면서까지 요미우리에 입단할 정도로 충성심이 뛰어난 선수였지만 FA영입된 스미타니 긴지로의 보상선수로 풀려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스]]로 이적했다. 그의 조부 우츠미 이소오도 요미우리에서 뛰어서 그의 등번호였던 26번을 달고 뛰었다. 한국에서는 [[이승엽]]의 요미우리 시절 에이스이자 [[2009 WBC]]~~의 [[한일 베이스볼 클래식]] 4차전~~에서 [[이용규]]에게 빈볼을 던진 것으로도 잘 알려져있다. * [[토노 슌]] (2005 - 2012) * [[오치 다이스케]] (2006 - 2014) * [[야마구치 테츠야]] (2006 - 2018) 일본프로야구 사상 육성선수의 최고 성공사례 중 하나로 꼽히는 좌완 투수. 고교 졸업 후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메이저리그]]에 도전했지만 4년간 싱글A마저 밟지 못하고 루키리그만 전전하다 요미우리의 입단 테스트에 합격해 육성선수로 일본프로야구에 겨우겨우 입성하는 파란만장한 프로 입문을 겪었다. 하지만 입단 2년차인 2007년 후반기부터 1군 붙박이로 정착하더니, 이후 일본프로야구 '''육성선수 최초의 신인왕'''을 차지하는 2008년부터 2016년까지 '''9시즌 연속 60경기 등판'''의 일본 기록을 세우고 홀드왕도 두 번 차지하는 등 요미우리의 허리를 책임지는 특급 셋업맨으로 활약했다. 통산 273홀드로 닛폰햄의 미야니시 나오키[* [[초노 히사요시]]와 함께 [[2006 도하 아시안 게임/야구|도하 참사]] 일본 대표팀 멤버.]가 2018년 갱신하기 전까지 일본프로야구 통산 최다 [[홀드]] 기록 보유자였다. 현재 요미우리 3군 투수코치이다. * [[마크 크룬]] (2008 - 2010) * [[세스 그레이싱어]] (2008 - 2011) [[KIA 타이거즈]]와 [[야쿠르트 스왈로즈]]에서 활약한 뒤 요미우리에 입성해서도 프론트라인 선발로 제 몫을 다했다. * [[디키 곤잘레스]] (2009 - 2012) 위의 그레이싱어처럼 [[야쿠르트 스왈로즈]]에서 활약 → 요미우리로 영전 테크를 탄 외국인 투수. 2010년 다승왕. * [[데니스 홀튼]] (2012 - 2013) 2011년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의 우승에 공헌한 뒤 2012년 요미우리로 이적했다. 그러나 2년 후 재계약을 포기하고 [[KIA 타이거즈]]로 적을 옮긴다. * [[스캇 매티슨]] (2012 - 2019) [[캐나다]]인 우완 셋업맨으로 [[JFK(한신)]]의 일원이던 호주 좌완 제프 윌리엄스를 제치고 일본프로야구 외국인 선수 통산 홀드기록 보유자(174홀드)가 된 선수. 일본에서만 421경기 등판, ERA 2.46, 174홀드 54세이브를 거두고 홀드왕을 두 번 차지하는 등(2013, 16) 오랫동안 요미우리의 필승 계투로 활약했다. 메이저리그 이외의 리그에서 뛰는 캐나다 선수 중에서는 가장 실력과 실적이 뛰어난 선수 중 하나라서 현역시절 메이저리거가 나갈 수 없는 국가대항전에서 오랫동안 마무리를 전담해 캐나다 야구계의 레전드 중 하나. * [[크리스 세든]] (2014) * [[타카기 하야토]] (2015 - 2017) * [[야마구치 슌]] (2017 - 2019) DeNA에서 11시즌간 활약 후 2017년에 교진으로 이적했는데, 이적 첫 시즌에 경비원 폭행 사건으로 대형사고를 치기도 했다. 하지만 2019년 다승과 승률, 탈삼진 부문 센트럴리그 1위를 차지하면서 부진했던 스가노를 대신해 에이스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하지만 2019년 프리미어12 결승전에서 1회부터 빅똥을 싸질러놔서 쌍욕을 쳐먹었다. 오프시즌에 요미우리 소속 선수로서는 최초로 [[포스팅 시스템]]을 통해 MLB에 진출했다. * [[모리후쿠 마사히코]] (2017 - 2019) 역동적인 투구폼을 가진 사이드암 좌완 불펜 투수. ~~하지만 FA 먹튀~~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